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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계약법상 필수 용어 해부: Terms vs. Conditions, 그리고 Representation vs. Warranties의 결정적 차이 (feat. M&A 계약의 진실)

shobu2025 2025. 6. 15. 19:09

 

국제 계약, 특히 해외 건설 및 M&A와 같은 대규모 거래에서는 "한 단어의 차이"가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M&A 계약서에도 '진술 및 보장' 조항이 익숙하게 등장하고 대법원 판례도 축적되어 있지만, 의외로 많은 실무자나 심지어 법률가조차 영미법상 'Terms', 'Conditions', 'Representations', 'Warranties'의 정확한 개념과 그 법적 효과의 차이를 간과하거나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국 계약법의 핵심 개념인 이 네 가지 용어의 정확한 의미와 법적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고, 특히 국제 M&A 계약에서 이 구분이 왜 중요한지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복잡한 국제 계약의 성공적인 체결과 분쟁 해결을 위해, 이 언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1. Terms vs. Conditions (그리고 Warranties, Innominate Terms) – 계약 조항의 등급과 그 효과

계약은 여러 가지 조항(Terms)들로 구성됩니다. 이 조항들은 계약의 근간을 이루며, 크게 명시적 조항(Express Terms)과 묵시적 조항(Implied Terms)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시적 조항은 계약서에 명확히 기재된 내용을 말하며, 묵시적 조항은 법률, 관습, 또는 법원의 판단에 의해 계약에 포함되는 내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조항'들이 모두 같은 법적 비중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국법은 조항의 중요도에 따라 위반 시 발생하는 법적 효과를 다르게 구분합니다.

Conditions (조건)

  • 성격: 계약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항입니다. 이 조항이 위반되면 계약의 근본적인 목적 달성이 불가능해지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 위반 시 효과: 계약 해지(termination 또는 repudiation) 권리가 발생하며, 추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즉, 계약을 아예 없었던 일로 돌리고 손해까지 배상받을 수 있는 강력한 효과가 따릅니다.
  • 예시: 물품 매매 계약에서 물품의 종류나 본질적인 품질에 대한 약속. 예를 들어, "이 기계는 시간당 100개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는데, 실제 생산 능력이 현저히 미달하는 경우 매수인은 계약을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Warranties (담보 조항)

  • 성격: 계약의 부수적인(collateral) 조항입니다. 계약의 핵심 목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차적인 약속에 해당합니다.
  • 위반 시 효과: Condition과 달리 계약 해지 권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만, 해당 Warranty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만 청구할 수 있습니다. 계약 자체는 유효하게 유지됩니다.
  • 예시: 물품 매매 계약에서 물품의 색상이나 작은 부품의 특정 브랜드에 대한 약속. 예를 들어, "기계의 특정 부품은 A사 제품을 사용한다"고 했는데 B사 제품을 사용한 경우, 기계 작동에 문제가 없다면 매수인은 계약을 해지할 수 없고, B사 부품 사용으로 인한 손실(예: 품질 차이로 인한 미미한 가치 하락)에 대해서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Innominate Terms (무명 조항 / 중간적 조항)

  • 성격: Condition과 Warranty의 엄격한 구분이 초래하는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입니다. 계약 체결 시 해당 조항이 Condition인지 Warranty인지 명확히 분류되지 않으며, 위반의 심각성(seriousness of breach)에 따라 법적 효과가 달라집니다.
  • 위반 시 효과:
    • 위반이 계약의 근본을 해칠 정도로 각하면 Condition 위반과 동일하게 계약 해지 + 손해배상이 가능합니다.
    • 위반이 경미하면 Warranty 위반과 동일하게 손해배상만 가능합니다.
  • 주요 판례: Hongkong Fir Shipping Co Ltd v Kawasaki Kisen Kaisha Ltd [1962] 사건에서 이 개념이 확립되었습니다. 선박의 감항성(seaworthiness) 조항 위반이 계약 해지 사유가 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며, 조항의 위반이 계약의 전반적인 이행에 미치는 영향의 심각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비교표: Conditions, Warranties, Innominate Terms

구분성격위반 시 법적 효과계약 해지 가능 여부

Condition 계약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항 계약 해지 + 손해배상 가능
Warranty 계약의 부수적인 조항 손해배상 불가능
Innominate Term 위반의 심각성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조항 심각도에 따라 해지 + 손해배상 또는 손해배상만 심각한 경우 가능

2. Representation vs. Warranties – 계약 전 진술과 계약상 보장의 차이

이 두 개념은 M&A 계약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Representations and Warranties (진술 및 보장)' 조항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법적 성격과 효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Representation (진술)

  • 성격: 계약 체결 이전에 한 당사자(일반적으로 매도인)가 다른 당사자(매수인)에게 계약 체결을 유도할 목적으로 행한 사실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는 계약 자체의 '조항'이 아니라, 계약 성립을 위한 배경 정보나 설명에 해당합니다.
  • 시점: 계약 체결 이전에 이루어집니다.
  • 위반 시 구제: '부실고지 또는 부실표시(misrepresentation)'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는 계약 위반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영국법의 경우 부실고지법(Misrepresentation Act 1967)에 따른 구제가 가능합니다. 미국의 경우 각 주(state)의 일반 계약법 및 불법행위법(tort law)에 따라 사기적(fraudulent), 과실(negligent), 또는 무과실(innocent) 부실고지에 대한 법리가 발전해 있습니다.
    • 계약 취소(Rescission): 계약을 소급적으로 무효화하여 당사자들을 계약 체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립니다.
    • 손해배상(Damages): 경우에 따라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합니다 (사기적 부실고지, 과실 부실고지 등).
  • 핵심: 계약의 조항이 아니며, 잘못된 진술은 '부실고지'로 다루어지며 구제 수단이 계약 위반과는 다릅니다. 취소권은 특정 요건(예: 상당한 시간 경과, 계약의 확정 등)으로 소멸될 수 있습니다.

Warranties (보장 또는 보증)

  • 성격: 계약 내부에 명시된 조항(term of the contract)입니다. 특정 사실이 존재하거나, 특정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계약 당사자의 약속입니다. (위 1번 섹션의 Warranty와 동일한 개념으로, 계약의 부수적 조항에 해당).
  • 시점: 계약 내부에 포함됩니다.
  • 위반 시 구제: '계약 위반(breach of contract)' 문제가 발생합니다.
    • 손해배상(Damages): 보장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합니다. (원칙적으로 계약 해지 불가)
  • 핵심: 계약의 '조항'이며, 잘못된 보장은 '계약 위반'으로 다루어지며 구제 수단은 계약법상 손해배상입니다.

M&A 계약에서 R&W 조항의 중요성

M&A 계약서의 'Representations and Warranties (진술 및 보장)' 조항은 이 두 가지 개념이 함께 사용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매도인은 대상 회사의 재무 상태, 법적 문제, 계약 관계 등에 대해 '진술(Representations)'하고, 동시에 그 진술의 정확성을 '보장(Warranties)'합니다.

이 조항들은 이중 기능을 합니다.

  1. 진술로서의 역할: 매수인이 대상 회사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계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2. 보장으로서의 역할: 해당 진술이 거짓이거나 불정확할 경우, 매도인의 계약상 의무 위반이 되어 매수인에게 손해배상 청구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만약 진술이 잘못되었을 경우, 매수인은 부실고지(Misrepresentation)에 따른 계약 취소 또는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고, 동시에 보장 위반(Breach of Warranty)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하게 되어 매수인의 권리 구제 폭을 넓힙니다. 특히 불실고지에 따른 계약 취소권은 특정 조건 하에서 소멸될 수 있으므로, 보장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이 실무에서 더욱 선호되는 구제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비교표: Representation vs. Warranty

구분성격시점구제 수단계약에 미치는 영향

Representation 계약 전 사실 진술 계약 체결 이전 불실고지(Misrepresentation)에 따른 취소 또는 손해배상 계약 취소 또는 손해배상
Warranty 계약 내 포함된 약속/보장 계약 체결 시/후 계약 위반(Breach of Contract)에 따른 손해배상 손해배상

3. 한국법과의 간략한 비교

 

우리나라에서도 '진술 및 보장(Representations and Warranties)' 조항은 M&A 계약 등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고, 우리나라 대법원 또한 영미법상 개념인 진술과 보장의 의미에 대해 판시해 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대법원 2015. 10. 15. 선고 2012다64253 판결(인천정유 사건)에서 대법원은 진술 보증 조항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가 공평의 이념 및 신의칙에 반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본 원심판결은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이 판결에 따르면 매수인이 진술 및 보증 조항의 위반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더라도 매도인의 손해배상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즉, 계약의 진술 및 보증 조항은 당사자들이 미래의 불확실한 위험을 합의에 따라 배분하기로 약정한 것이므로, 설령 매수인이 정보를 인지했더라도 매도인의 약속 불이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M&A 거래에서 진술 및 보장 조항이 가지는 계약적 구속력을 명확히 한 중요한 판결입니다..

 

결론: 계약은 언어이며, 언어는 힘이다.

계약서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에는 깊은 법적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Terms', 'Conditions', 'Representations', 'Warranties' 이 네 가지 용어의 정확한 이해는 국제 계약 협상 과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고, 잠재적인 분쟁 발생 시 효과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며,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거래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복잡하고 고액의 리스크가 수반되는 국제 계약에 임할 때는 반드시 해당 준거법에 정통한 법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고, 계약의 언어를 완벽하게 숙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이 국제 계약의 언어를 해독하는 데 작은 지침이 되기를 바랍니다.